2014년 1월 12일 일요일

몬테네그로 잡설 11 : 대세르비아는 나의 것

니콜라공이 동방위기의 틈을 타고 몬테네그로를 세계지도에 올린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1878년 이전과 이후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만큼 달랐다. 오직 오토만에 대한 증오 만으로 국가성립의 동력을 삼았던 몬테네그로, 이런 변화를 깨닫고는 있었나?

1878년 이전까지 몬테네그로는 오토만 터키에 3면 포위된 형국이었다. 하지만 독립 이후 북서쪽 헤르체고비나는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땅이 됐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여전히 오토만 땅이다. 하지만 같은 오토만이라고 하더라도 과거와 달랐다. 이제 알바니아 지역에서도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으로 일컬어지는 알바니아. 스스로를 쉬칩타르Shqiptar라고 부른다(알바니아의 자칭 정식국명은 쉬치퍼리아Shqiperia). 오토만 터키에서 알바니아 출신 인재들을 많이 발굴하면서 인구의 상당부분이 17-18세기 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발칸의 다른 민족들이 서로 독립을 향해 달려가면서 거의 마지막까지 오토만의 신민 노릇을 다했지만, 그렇다고 자기 생각이 없었겠나?

오토만이 러시아에 깨지고, 서구의 열강들이 발칸의 국경을 새로 그리고 있던 1878년 알바니아 민족지도자들이 코소보 프리즈렌에 모여서 그들만의 연맹League of Prizren을 발족했다. 술탄에게 청하노니, 알바니아 민족이 사는 비얄렛(오토만 행정구역)을 하나로 통일하고 자치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한참 정신이 없던 터키는 대충 알아듣는 척 만하고 깔아 뭉겠다. 1878년 이후 넓어진 몬테네그로 땅에는 알바니아인들이 사는 지역이 편입됐다. 니콜라는 이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겠다는 명쾌한 아이디어가 없었다.

알바니아 전사. '형제를 배반한적이 없고 적을 용서한 적이 없는' 싸나이 상남자의 모습이다.  알바니아 역시 몬테네그로와 비슷한 부족 중심의 사회로, 몬테네그로 못지 않은 마초사회였다.

또 하나 부각된 것이 있다면 세르비아와의 관계다. 동포 의식이 강했지만, 몬-세 양국의 정치리더들은 모두 자기만이 과거 세르비아의 영광을 재현한다고 믿었다. 당연히 라이벌 의식이 싹트기 마련이다. 니콜라의 치세에 골치가 아팠던 것은 당시를 풍미하던 민족주의 탓에 세르비아와의 통일을 공공연히 요구하는 몬테네그로인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니콜라의 통치스타일은 전제적 압제는 아니지만, 권위주의적인 건 사실이었다. 바깥문물을 접한 청년들이 몬테네그로 체제가 그런대로 입헌왕정체제를 잡아가는 세르비아에 비해 '구리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일부 세르비아 통일론자들이 니콜라 암살계획을 세웠다가 들통나는 일이 있었다. 세르비아보다 인구도 훨씬 적고 물산도 없는 몬테네그로 왕자 니콜라의 생각이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세르비아와의 애증관계는 몇가지 개인적인 면모도 있다. 맏딸 조르카Zorka가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장자 페타르의 청혼을 받아 1883년 시집갔다. 후에 오브레노비치 왕가의 뒤를 이어 세르비아의 왕이 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장가갈 때만 하더라도 집도 절도 없는 낭인신세였다. 하지만, 페타르는 헤르체고비나 봉기 때도 자원해서 참가했던 열혈청년이었던 만큼,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그것이 장인에게는 어지간히 불편했던 모양이다. 니콜라는 이런 사위하고 살가워지지 못하고 그렇다고 오브레노비치 집안과도 친해지지 못했다.

1910년 즉위 때 쯤해서 찍은 니콜라 1세 가족사진.  3남 9녀를 낳았다. 딸들은 대부분 유럽/러시아의 대공들에게 시집보냈는데, 가장 큰 히트상품은 이태리의 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에게 시집간 5녀 옐레나. 호사가들은 몬테네그로 최대수출품을 공주들이라고 하고 니콜라 1세를 '유럽의 장인어른'이라 칭했다.

어쨌거나 근대국가로 발돋음은 해야하니까 1905년 헌법도 만들긴 만들었는데, 촌사람 니콜라공에게는 영 마뜩치 않았다. 꼭 이런 게 있어야 돼? 골치가 아팠던 공은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910년 왕으로 즉위했다. 몬테네그로가 공국(Principality)에서 왕국(Kingdom)으로 승격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아무리 옛날 보다 땅도 넓어지고 왕국도 됐다지만, 이때 인구는 20만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 황실의 보조금 등 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왕실을 지킬 재정이 없었다. 터키놈들 몰아낸다고 무슬림들을 영토에서 쫓아냈더니 그나마 있던 장인이나 상인들까지 없어졌다. 한평생 전사로만 자라난 몬테네그로 남성들은 노동과 경제에 대해서는 전혀 개념이 없었다. 한마디로 몬테네그로의 지속가능성은 매우 취약했던 것이다.

왕이 된 니콜라는 결국 믿을 건 땅 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과거에는 항상 헤르체고비나를 노렸지만, 지금은 오스트리아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아갈 방향은 오토만 지배하의 코소보와 알바니아 밖에 없다.

특히 코소보는 세르비아를 제국의 반열에까지 올렸던 네마냐 왕조의 중심근거지다. 여기를 지배하게 된다면, 세르비아에 뒤지지 않는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세르비아인으로서의 민족의식을 가지고 성장한 몬테네그로. 정작 세르비아와의 라이벌 의식이 몬테네그로 만의 정체성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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